허수아비네
허수아비네
오래전에 허수란 놈이 살았는데, 그놈 아비 어미 말을 잘 듣지 않았어.
그 아비는 봄이라기에는 아직 추운 3월 초가 되면 아니 되자마자, 들녘의 논에서 산비탈 밭까지 오르락내리락 삽과 괭이를 메고 종일 바빴지.
어느 정도였는고 하면.
허수 어미는 늘 ‘땅이 지 마누란지 내가 지 마누란지 몰라.’ 하며 논밭 일만 시작되면 밤일 한 번 청하지 않으니 서운키도 했으니.
차마 여자가 한 번 하자고 할 수는 없었어.
‘아무리 농사일이 바빠도 할 것은 해야지 말이야. 썩을 놈이.’
냇가에서 빨래하다 들어 보면 옆집 봉이 어매도 건너 건너 곰보딱지 칠봉이 어매도 어젯밤에 한 판씩 한 것 같은데 또 나만 못했네.
…….
둥근 돌 위에 오른 허수아비의 작업복만 방망이에 뒤지는 거지. 퍽퍽퍽…….
부지런하고 성실한 허수아비.
농사일도 항시 남보다 앞서서 해나갔어.
모내기부터.
동네 농사달력 같은 사람이었다니까.
한 해 농사의 마무리는 밀짚모자를 눌러 쓴 허수아비가 들녘의 새를 쫓는 일로부터 시작이 돼.
허수아비는 주먹밥 두 덩이와 된장 한 덩이를 점심으로 싸들고 나가서 온종일 논두렁을 돌며 새들을 쫓았지.
논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밭에서 고추 몇 개를 따서, 실개천에 흔들흔들 씻으면 그것이 반찬이 되고.
사실 갈아먹는 논밭도 모두 남의 것이었어.
새들에게까지 빼앗기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지.
그런데 그 허수아비가 어느 날 죽었어.
죽은 얘기까지 만들자면 너무 복잡해, 그냥 죽었어.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는 마흔이 넘으면 더 곧잘 죽었어.
헛소리해대며, 젊은 나이임에도 치매였다나 뭐!
허수 어미만 답답하게 되었지.
채팅이 있던 시대도 아니고…….
아무튼, 그날도 읍내 놀음판에서 고리를 뜯던 중인 허수가 그 소식을 듣고 뛰어 돌아왔지.
그 어미 아비의 심성이 착한데, 잠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그랬지 허수도 나쁜 아이는 아니었거든.
또 돈이 없으니 판에는 끼지도 못하고 잔심부름이나 하고 말이야.
우선 급한 대로 삼박사일 슬펐어.
그러다 일 년이 넘도록 슬펐고 삼년상까지 마쳤지.
훵한 마음에, 아비가 갈던 논밭을 돌아보았어.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만 하더니 이 너른 논밭을 모두 허수 것으로 만들어 놓고 갔지.
허수는 다시 눈물이 났어.
그 아비에 이어 농부가 된 허수도 열심히 일했어.
아비만큼 보태지는 못하더라도 받은 것이라도 제 자식에게 물려줄 요량이었지.
하지만 허수는 그 아비처럼 밤일까지 팽개치지는 않았지.
시대의 경향이 제법 바뀌었거든.
품종개량에 도구화에 약간의 기계화까지, 그 효율로 인해 제법 시간적 여유도 있었고 말이야.
응, 아비 덕에 생활의 여유도 좀 생겼고.
곧잘 허수의 검은 아내가 점심을 이고 논두렁으로 오기도 하는데, 점심 후에는 아내 손을 붙들고 재빨리 야산으로 올라가기도 해.
그런데 뭘 하는지 한참을 돌아오질 않아.
점심 자리에는 파리들만 신났지.
시간상으로는 칡을 캐는 듯한데.
굵은 칡은 캐기가 참 힘들거든.
그런데 그의 아내가 상기된 표정으로 옷이며 머리며 온통 풀을 묻힌 채 내려오는 걸 보면 부부싸움을 한 것 같어.
약한 것이 여자라, 허수가 아내를 이길 테니 그의 아내는 늘 밑에 깔린 채 얻어터지면서 멀라고 그리 자주 오는지 몰라.
그것도 방긋 웃으면서 오거든.
문제는 터지고 가면서도 방긋 웃어.
어허, 참 내.
어느 가을 허수는 그 아비처럼 논두렁에 서서 새를 쫓는 중이었어.
그런데 문득 논 한복판에 아비가 보여.
나에게 이 논과 밭을 건네주기 위해, 가난의 대를 끊으려고 애쓰던 아비가 보여.
허수에게 가장 고맙고 아름다운 사람, 아부지가 논 한가운데 떡 서 있어.
그날 집으로 돌아온 허수는 대나무를 엮어 골격을 갖춘 후 짚으로 두툼하게 살을 붙이고, 농사철에 입던 옷과 모자 중 낡은 것을 입혀 사람 모양을 만들었어.
낡은 것들을 찾다 보니 결국 다 아부지 것이여.
다음 날 그의 아비가 삶 전부를 묻은 그 논 가운데 그것을 떠억 세웠지.
멀리서 보니 영락없이 아부지네.
우리 아부지가 저그 서 있네.
죽어서도 서 있네.
묘하게 그날부터는 새들이 오질 않더라구.
지들끼리 찍찍대다가 그냥 다른 논으로 가버리더라니까.
허수는 그냥 아비의 모습을 그려 본 것뿐인데.
퇴직하시던 날 얕은 술에 젖어
붉은 얼굴로 허허하시더니
발끈대는 성미야 가끔 볼 수 있었다지만
횟수도 정도도 많이 낮아졌었다.
어느새 술은 힘에 겨웠고
여행도 등산도 즐거움이 못 되셨던 듯
베란다에 쪼그린 채 화분만 토닥이시다가
꽃이 피면 함께 웃으셨지.
어느 날은
불쑥 게이트볼 도구를 사 들고 오셔서
대문 앞에서 벙글거리셨지.
그러나 그것도
너무 늙은이 놀이라 싫으셨던 모양이다.
봄비가 온다.
어느 봄비 오던 날
빈방에 앉아
무엇 하시다 뱉어내는지
기침 소리 두 개 나무토막 던져지는 소리로 새어 나오고
화장실 가는 길에
방문에 귀를 기울여보았더니
아리랑 리듬 닮은
늘어진 방귀 소리가 들린다.
치매로 가셨지.
치매 오는 길목, 빈방에 앉아
약봉지로 진지를 만들고
뭔가 소리를 만들어 총알처럼 쏘아보며
그 길목을 지키셨나 보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