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317쪽이다)
친구란 인생의 사람이다. 인생을 거르면 알맹이로 남는 사람 중 몇은 친구일 것이다. 그것도 세월이 많이 흘러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친구란 소중한 가족과 함께 기억되니 참으로 의미 있는 사람이다. 친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친구에 대한 기억은 너무 선명함에도 생략하고 줄이고 바꾸었다. 그의 명예를 고려한 것이며, 전체적으로는 기억의 불확실성과 추측에 의한 전개를 감안하여 허구의 글이라고 말하겠다. 그래 잘못 기억하거나, 그에 따라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허구이다. 그렇더라도 내 기억의 전부이다. 지난 시간과 장소 속 그리운 친구 혹은 서운한 친구에 관한 애증(愛憎)의 이야기이다. 글 속의 친구들은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대부분이고, 진철이는 스무 살 이후에 만났다. 또 수철이는 한동네에서 살았고 초등학교 때는 같은 반이었다. 승철과 원철이는 서울에 살고, 경철이는 그 도시 이름에서 이상하게 박하 냄새나는 미국의 시카고에서 산다. ‘시카고’와 ‘박하’는 발음이 비슷한 음절이 있고, ‘시’자는 박하의 맛을 표현하는 데 사용될 법한 음절이기 때문일까. 해놓고 보니 시시한 말이다. 석철과 연철, 민철과 수철과는 같은 도시에서 살지만, 몇 년에서 수십 년 만에 한 번씩 만나는 사이이다. 그런데 민철이는 대략 3년 전부터 자주 만나게 되었다가, 다시 거리를 두는 중이다. 민철을 만나면 불쾌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수철이는 죽었는데, 이 서운한 마음은 결코 슬퍼서가 아니다. 수철을 제외하고, 처음에는 애틋한 마음과 자랑 및 존경의 마음으로 시작한 글인데, 반전(反轉)이 있었다. 글을 쓰는 중에 생긴 반전이라서 글이 비틀어진 감이 없지 않다. 아예 ‘민철이’라는 글은 끼워 넣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반전의 마당에 오히려 필요한 글이 되었다. 민철을 생각하면 심하게 구겨진 종이 한 장이 공 모양으로 뒹구는 것 같다. 최소한 구겨진 사람이다.
역시 망설였는데, 이 책에는 서로에게 깨복쟁이인 수철이 이야기를 길게 넣었다. 자꾸 이었고, 애초보다 분량이 많이 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리고 수철이 부분이 실마리이자 주 줄거리였는데, 경철과 민철의 이야기도 그에 못지않게 비중이 실렸다. 글을 쓰는 중에 생긴 반전으로 인해 더 작심하고 쓴 점도 있다. 따라서 글의 마디(소제목)도 많이 생겼다. 배신(背信)이나 소시오패스적 반전의 친구들이다. 늘 가까이하고 싶은 친구에서 불가근에 치우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정도로 지낼 생각이다. 책의 분량이 증가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제고 수철에게 뭔가를 외면하여 덮는 것은 하책이라고 조언하고 싶었는데, 그가 죽었다. 사실 외면하는 그의 고개도 내내 불편했을 것이다. 서로 인연을 잘 가꾸지 못했지만, 명복을 빈다. 그가 소풍 가서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하고 노래하던 생각이 난다. 수철이는 이후 관련 글에서 지옥으로 보냈다. 희미한 기억에서 허구로 넘긴 것이다. 수철이는 죽으면 다 끝난 것인 줄 알겠지만, 글을 끄적이는 친구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이쯤에 방향 전환 겸해 시시한 에피소드 하나를 끼운다면, 고2쯤 여름방학을 맞아 원철이가 제주도 제집으로 귀향할 참이었다. 원철이가 나더러 방학 때 뭐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거창하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영어 원서로 읽을 것이라고 답했는데, 정작 하나도 읽지 않았다. 그렇게 잊힌 줄 알았는데 방학이 끝나고 원철이가 물었다. ‘노인과 바다’를 원서로 읽었느냐고. ‘읽다가 중간에 그만두었어. 배와 관련된 전문적인 단어들이 많아서 말이야.’ 사실 전문적이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떠올라서 만든 말이었다. ‘그래! 그래도 별로 어렵지 않은데….’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철이는 읽은 듯했는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찌르면, 나는 들통난 거짓으로 얼굴이 붉어졌을 텐데 말이다. 원철이는 거짓말을 눈치채고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성인(聖人)이 있다면 원철이 같은 유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각이 나서 적어 놓는다. 머릿속에 평생 뱅뱅 머무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기록으로 남는다. 그리고 진철이 이야기를 더한 것이 즐겁다. 가까이 머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고마운 사람이다. 의리의 사람이다.
아무튼 여러 이유를 써놓자니 수철이 이야기와 더불어 ‘철이 이야기하다 귀신까지’가 더 길어졌다. 수철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저승과 귀신 이야기까지 이르렀고, 급기야 제목까지 바꾸었다. 몇 줄 되지 않지만, 곳곳의 인연(因緣)이라는 말의 의미나 가치를 주장한 것은 저절로 이른 생각치고 제법인 생각이 아닌가 한다. ‘인연’ 아래 종교의 말이 있다고 썼다. 사랑과 자비 및 평등 그리고 인(仁)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까지 인연을 잘 가꾸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또 나름대로 죽음과 귀신과 저승, 지옥도 얕게 정리했다. 그래서 이 책에 친구와 귀신과 저승 등에 관해 쓰게 되었다. 그리고 ‘승철을 만났고, 2년 만에 온 경철은 만나지 않았다’가 실제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글(책)을 쓰는 내내 이 소제목이 마지막 글이지 싶었는데, 자꾸 길어졌다. 또 조개모변(朝改暮變) 했다. 어느 부분이 완성된 듯했지만, 수시로 더하고 고쳐야 했다. 아침과 저녁이 아니라 깊은 밤에 일어나거나 누구와 대화 중 혹은 거리를 걷다가, 차분히 전봇대에 기대서서 뭔가를 기록한 적도 많다. 취해서 수정·보완한 적도, 물론이다. 질을 떠나서 글을 쓴다는 것은 하드웨어적으로도 고통이다. 끝으로 친구 승철과 원철 및 진철에게 존경과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존경하는 석철과 연철이랑 가깝게 지내지 못한 것은 서운하다. 그들이 훌륭한 만큼 내 여건이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얼핏 짐작한 대로, 2021년 10월의 술자리가 마지막이었고 그 귀한 자리의 술값은 석철이가 냈다. 이후 수철은 죽고, 나는 경철과 민철을 싫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연(因緣)의 마무리 의미가 있는 자리였는데, 석철이 적지 않은 술값을 치른 것은 복으로 돌려받을 일이다. 아무튼 다 좋은 주식(株式)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가려진다. 친구와의 인연은 더 의리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고 생각한다. 의리를 맞추지 못해 사라진 사람은 어느 부분이 비겁했을 것이다. 그래도 한 시절 어울려서 잘 살았다. 마음속에 사연을 담고 뱅뱅 머물러 준 것이 어울린 것이다. 친구들에게 고개 숙여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책 속의 귀신 이야기는 앞으로 서너 편 올리려고 한다. 그리고 멋도 모르고 그냥 누른 것인데, ‘챌린지’가 박힌다. 별수 없이 3일 동안, 주최 측과 내 체면을 고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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